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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27. <부정공>만회공휘재호묘지명(晩悔公諱在浩墓誌銘)
1. 문헌 목록 〉20. 20世 〉29. <부정공>조공부부쌍효비문(趙公夫婦雙孝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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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부정공>술암처사공휘선호묘표(述菴處士公諱善浩墓表)
述菴處士公諱善浩墓表 玉川趙氏爲虔谷公苗裔者世居湖南之順天郡孝友文學足以爲鄕先生者多諱善浩字伯慶即其一也高麗檢校門下侍中諱璋爲鼻祖至曾孫有諱元吉號農隱封玉川府院君諡忠獻以道學忠義名齊圃冶是生諱瑜即虔谷也麗季入杜門洞我朝徵不起以前副正終焉是生諱崇文號竹村官兵馬節度使 端廟丙子與其子敎官諱哲山號龜川同禍後 贈正卿諡節愍官生諱瓊瓊痛家禍終身不仕至孫諱愷官禮賓寺參奉盖 宣祖命錄丙子死事人后故有是恩除生諱宗元壬辰以奉事勤王事見錦山義蹟碑歷二世諱致亨贈參判諱世行節制使即公六世五世祖也曾祖諱顯龜祖諱基信考諱鎭龍號湛軒篤於孝友仁洽濟物爲南服偉人妣豊川盧氏光鼎之女玉溪禛后公天姿非凡狀貌凝重自幼不隨群兒遊戱稍長文藝大進爲門戶計雖隨衆治功令所志則在古人爲己之學事親主承順愛諸弟長枕同宿美味必分遇家間吉凶必準朱子家禮溫公雜儀行之諸經史莫不貫穿於小學書尤致力焉親疾露立乞以身代及丁憂號擗頓絶爲偏母在堂雖自寬譬執禮則嚴勸諸弟曰居喪人子所當自盡非如養生之今日未足且待他日者也殫誠竭力勿之有悔焉可也自奉甚薄而施與則甚豊或値良辰和煦輒以芒鞋幅巾逍遙山水間因誦晦翁琴書四十年幾作山中客之句而自樂焉嘗述一篇文自言其志其略曰男兒生逢晟世早登靑雲位躋公卿當竭忠盡才堯舜我君民矣不然占得好林泉隱居敎子孫詩酒琴碁以終吾年足矣因自號述齋 高宗丁卯五月十四日卒距其生 純祖甲申得四十四臨終無他言但曰余今水得終養而死天地間一罪人重言復言者皆此言葬順天住巖面大光洞移窆于蘇亭山先兆右局坤坐原初配朔寧崔氏相朝之女壬午生己未卒墓祔左繼配咸安尹氏學儉之女癸卯生乙酉卒葬可葬洞先山祖妣墓下午坐原崔氏擧三男一女秉斗秉文秉周李秉權妻尹氏育一女朴埈植妻孫淇煥正煥成煥日煥秉斗出洪燮桂燮孝燮穩燮元瀅奎鄭鍾烈妻秉文出冑燮禹燮鏡燮梁圭賢李孝淳梁會銓妻秉周出李升來趙斗燮李婿男若女朴煥龍韓敏鎬崔成鐵朴婿男若女曾孫休警淇煥子餘並幼嗚呼公志高而行篤約己而惠人軆用備矣苟有所試必不草草而沒齒田野世無知者惜哉秉文以其誌狀請余爲表阡之文余遂不辭檃括如是尙可以徵信於百世之下否繫之以辭曰忠孝門公又趾美篤躬行禮儀與比喜施與有人厨風善居喪與二連同短厥造難諶者天后克昌福善則然穹千秋墓前之石盍觀此載公實蹟 德水 李商永 撰 술암처사공휘선호묘표(述菴處士公諱善浩墓表) 옥천(玉川) 조씨(趙氏) 건곡공(虔谷公)의 후예로 대대로 호남(湖南) 땅 순천(順天)에 살면서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그 고을의 선생이 된 사람이 많은데、 휘는 선호(善浩) 자(字) 백경(伯慶)이 곧 그중 한 사람이다。 고려(高麗)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장(璋)이 시조(始祖)이며 그의 증손(曾孫) 원길(元吉) 호(號) 농은(農隱)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封)하고 시호(諡號)를 충헌(忠獻)이라 하여 명성이 포은(圃隱) 야은(冶隱)과 같았고 그의 아들 유(瑜) 호(號) 건곡(虔谷)은 고려말(高麗末)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우리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고려 벼슬 부정인 그대로 세상을 떳다。 이가 숭문(崇文)을 낳았는데 호는 죽촌(竹村) 벼슬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세조(世祖) 병자년에 그의 아들 교관(敎官)을 지낸 철산(哲山) 호 귀천(龜川)과 같이 화(禍)를 입었는데 뒤에 정경(正卿) 벼슬과 시호(諡號) 절민(節愍)을 받았다。 교관공의 아들 경(瓊)은 가화(家禍) 당한 것을 뼈아프게 여겨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그의 손자 개(愷)는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는데 이는 선조(宣祖)가 명록(命錄) 한 병자사사인(丙子死事人)의 자손이라 하여 이 은전(恩典)을 베풀어 준것이다。 그의 아들 종원(宗元)은 임진년에 봉사(奉事) 벼슬로 나라 일에 충성한 일이 있는데 이 사실이 금산의적비(錦山義蹟碑)에 보인다。 二대를 지나 참봉(參奉)을 증직(贈職) 받은 치형(致亨)과 절제사(節制使)를 지낸 세행(世行)은 곧 공의 六세·五세조이다。 증조는 현구(顯龜)、 조는 기신(基信)이요 고 진룡(鎭龍)은 호(號)가 담헌(湛軒)인데 효우(孝友)에 돈독하여 모든 사물을 인(仁)으로 구제(救濟)하는 등 남쪽의 한 위인(偉人)이었다。 비(妣)는 풍천노씨(豊川盧氏) 광정(光鼎)의 딸인데 옥계(玉溪) 진(禛)의 후예이다。 공은 성품이 비범하고 용모가 듬직하여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다。 점점 성장해감에 따라 문예(文藝)가 진취되자 문호(門戶) 빛낸 마음으로 여러 사람을 따라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원래 뜻한 바는 古人들의 爲己之學이었다。 사친(事親)엔 승순(承順)을 위주로 하고 아우들을 사랑하여 같은 방에서 같은 벼개를 사용하는 등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언제나 나누어 먹었으며 집안에 어떤 일이 있으면 반드시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온공잡의(溫公雜儀)」를 기준하여 실행하였다。 여러 경전(經傳) 사기(史記)를 두루 통달하였으나 「소학(小學)」에 더욱 힘을 썼다。 어버이 병환 때는 자기 몸으로 대신 해줄 것을 하늘에 직접 빌었고 초상을 당했을 때는 울부짖다가 기절까지 하였다。 홀어머니가 계신 것을 깨닫고 스스로 태연한 척했지만 예법만은 엄히 지켰으며 또 여러 아우들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거상(居喪)이란 사람의 자식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해서 생전에 오늘 봉양 못하면 내일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뒷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자신에 대해서는 박하게 하고 남에게 베풀 때는 풍부하게 하였으며、 따뜻한 봄날이 되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천(山川)을 두루 노닐면서 주자(朱子)가 지은、 『금서(琴書)로 지내온 四十평생에、 琴書 四十年 몇 번이나 산중객이 되었던가?』 幾作山中客 라는 시(詩)를 읊조리며 즐거워 하였다。 공은 또 언젠가 한편의 글을 지어 자기의 뜻을 서술한 바 있는데 그글은 다음과 같다。 『남아(男兒)로 이세상에 태어나 좋은 세상을 만나면 일찍 벼슬길에 올라 공경(公卿)이 되거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우리 임금 우리 백성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어야 하려니와 그렇지 못할 바엔 살기 좋은 임천(林泉)으로 찾아가 자손을 가르키는 한편 시(詩) 주(酒) 거문고 바둑 등을 벗삼아 조용한 한평생을 보내면 그뿐이다。』 라고 하고 인하여 호를 술재(述齋)라 하였다。 高宗 丁卯년(一八六七) 五월 十四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純祖 甲申년(一八二三)에 태어났는데 四十四세 나이로 세상을 뜰때 하는 말이、 『내가 지금 부모 봉양을 다하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천지(天地) 사이에 한 죄인이로구나!』 이렇게 몇번이고 중얼거렸다 한다。 처음엔 순천 주암면(住巖面) 대광동(大光洞)에 장사했다가 뒷날 소정산(蘇亭山) 선조(先兆) 오른쪽 곤좌(坤坐)에 이장하였다。 초배(初配)는 삭녕최씨(朔寧崔氏) 상조(相朝)의 딸인데 임오생(壬午生)으로 기미년(己未年)에 세상을 떴으며 묘는 공의 묘 좌측에 부장하였고 계배(繼配)는 함안윤씨(咸安尹氏) 학검(學儉)의 딸로 계묘년에 태어나 기유년에 세상을 뜨니 가장동(可葬洞) 선산(先山) 조비(祖妣) 묘 아래 오원(午原)에 안장하였다。 최씨(崔氏)가 三남 一녀(三男一女)를 두었는데 병두(秉斗)·병문(秉文)·병주(秉周)와 이 병권(李秉權)의 처이고 윤씨(尹氏)는 一녀를 두었는데 박 준식(朴埈植)의 처이다。 손자로 기환(淇煥)·정환(正煥)·성환(成煥)·일환(日煥)은 병두가 낳았고、 홍섭(洪燮)·계섭(桂燮)·효섭(孝燮)·온섭(穩燮)과 원 영규(元瀅奎) 정 종렬(鄭鍾烈) 처는 병문(秉文)이 낳았고、 주섭(冑燮)·우섭(禹燮)·경섭(鏡燮)과 양 규현(梁圭賢) 이 효순(李孝淳) 양 회전(梁會銓)의 처는 병주(秉周)가 낳았다。 이 승래(李升來)와 조 두섭(趙斗燮)은 이 병권의 아들과 사위이고、 박 환용(朴煥龍)과 한 민호(韓敏鎬) 최 성철(崔成鐵)은 박 준식은 아들과 사위이고 증손(曾孫)은 휴경(休警)인데 기환(淇煥)의 아들이다。 다음은 모두 어리다。 아! 공(公)은 뜻이 높고 행실이 돈독하였고 자기 몸엔 검약(儉約)하면서 남에겐 은혜를 베풀었으니 체(體)와 용(用)이 모두 갖추워졌다 하겠다。 진실로 쓰인 바가 있었더라면 필시 초초(草草)하게 전야(田野)에 늙지는 않았을 터인데 세상에 아는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병문(秉文)이 그의 행장(行狀)을 들고와 나에게 묘도에 세울 글을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몇 마디 바로 쓰지만 이것이 과연 수 백년 뒤에 증거가 될지 의문이다。 다음과 같이 辭를 쓴다。 충효(忠孝)의 문에 태어나 또 다시 아름다움을 실천하였네。 忠孝門公又趾美 행하는 것을 돈독히 예의(禮義)에 까지…… 篤躬行禮儀與比 시여(施與)를 좋아하리、 팔주(八廚)의 기풍이런가! 喜施與有人厨風 거상(居喪)마저 훌륭하니 이연(二連)이로세。 善居喪與二連同 짧은 그의 수명은 알지 못할손 하늘이구료。 短厥造難諶者天 번창한 후손이여 착한이 복받는게 그렇다던가。 后克昌福善則然 천추(千秋)에 드높은 묘 앞의 비석이어니。 穹千秋墓前之石 실어놓은 공의 행적 그 아니 보리。 盍觀此載公實蹟 德水 李商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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